요한계시록 13장 강해 설교
짐승의 권세와 성도의 인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 13장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장은 성경 전체 중에서도 가장 많은 오해와 상징으로 가득한 본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묵시록이 전하는 진리와 도전, 그리고 성도의 삶에 요구되는 분별력과 인내를 명확히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종말의 두려움을 그리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말의 현실 속에서도 성도들이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를 교회에게 알리고자 주신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특히 13장은 두 짐승의 등장과 그 권세, 그리고 하나님 백성의 태도에 대해 말하면서, 사단의 거짓 통치와 하나님 나라의 진짜 주권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짐승의 정체와 권세(계 13:1-10)
바다에서 올라온 첫 번째 짐승은 요한의 눈에 매우 괴기한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고... 그의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계 13:1). 이 짐승은 다니엘서에 등장했던 네 짐승의 특성을 모두 지닌 것으로 보이며, 이는 세계 제국들의 악한 통치성을 종합적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머리와 뿔, 그리고 표범과 곰, 사자의 형상은 정치적 권세와 군사력, 경제력을 모두 아우르는 악의 세력을 나타냅니다(계 13:2).
이 짐승은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다고 말씀합니다(계 13:2). 여기서 용은 계시록 12장에서 하늘에서 쫓겨난 사단입니다(계 12:9). 사단은 자신의 패배 후, 세상 정치 권력을 통해 교회를 공격하려는 전략을 세웁니다. 짐승은 그 자신이 스스로 권세를 가진 것이 아니라, 사단으로부터 위임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의 정권이나 체제가 하나님의 질서를 떠나 자신을 신격화하려 할 때, 그것이 단순한 체제가 아니라 사단적 통치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 짐승을 보고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며 경배하는 장면은(계 13:4), 이 세상 권세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격화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경제력과 군사력, 문화적 권세를 바탕으로 한 세속 권력이 우상화되며,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보다 이 짐승을 더 두려워하고 경외하게 됩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이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계 13:7). 겉으로 보기엔 짐승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정 기간 동안 악이 득세하는 것을 허용하시되, 결국은 심판하십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악의 일시적 승리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과정 속에서 성도의 참된 믿음을 시험하시고, 정금같이 단련하시려는 뜻이 있으십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계 13:9). 이 말씀은 단지 귀로 듣는 청각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분별하라는 초청입니다. 진리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 영적 현실을 꿰뚫어 보는 분별력이 성도에게 요구되는 때입니다.
두 번째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역할(계 13:11-15)
두 번째 짐승은 땅에서 올라오며, 어린 양처럼 두 뿔이 있으나 "말하는 것은 용처럼 하더라"고 증거합니다(계 13:11). 이는 외형적으로는 양 같은, 즉 온순하고 선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사단의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 짐승은 흔히 '거짓 선지자'로 해석되며, 종교적 권위나 철학, 이념적 체계를 상징합니다. 즉, 첫 번째 짐승이 정치적, 군사적 권세라면, 두 번째 짐승은 그 권세를 정당화하고 영적 권위로 포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는 첫 번째 짐승을 위하여 "불이 하늘에서 땅에 내려오게 하고"(계 13:13), 거짓 이적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종교적 외양을 지닌 세속적 가치가 얼마나 사람들을 현혹시키는지 봅니다. 기적이나 신비로운 체험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감성을 자극하고 종교적 언어로 포장된 이념을 주입하며, 성도들의 충성을 하나님이 아닌 세속 질서에 돌리게 합니다.
결국 그는 사람들에게 "우상을 만들게 하고"(계 13:14), 그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 하며, 그것을 경배하지 않는 자는 다 죽이게 합니다(계 13:15). 이는 단순한 동상이나 조형물이 아닙니다. 체제 자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처럼 작동하여 사람을 통제하고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실체로 변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짐승의 표와 경제적 통제(계 13:16-17)
가장 많은 해석이 갈리는 부분이 바로 짐승의 표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계 13:16), 이 표 없이는 사고팔 수 없게 만듭니다(계 13:17). 이는 단지 미래에 도래할 어떤 바코드나 칩의 문제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충성의 표징, 소속의 상징입니다. 손과 이마는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행하는 장소로 언급됩니다(신 6:8). 따라서 짐승의 표란, 세속 체제에 대한 충성과 순종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경제적 압박과 사회적 구조 속에서 하나님보다 세속 질서에 순응하도록 강요받습니다. 진리를 따르기 위해 직장에서 불이익을 감수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립을 견디는 일들이 바로 이 짐승의 표 앞에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결국 표를 받느냐 마느냐는 단순히 육체적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충성과 주권의 문제입니다.
숫자 666의 의미(계 13:18)
마지막으로 유명한 숫자, 666이 나옵니다. 요한은 이것을 "사람의 수"라고 말하면서,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라 말합니다(계 13:18). 숫자 7은 완전수, 하나님의 수로 여겨졌고, 6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불완전함을 상징합니다. 그런 6이 세 번 반복되었다는 것은 철저한 불완전성, 즉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의 교만과 실패를 뜻합니다. 666은 사단적 권세가 아무리 완전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권세 앞에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선언입니다.
이 숫자는 어떤 특정한 인물이나 시스템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시대, 모든 역사 가운데 하나님을 흉내 내며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존재는 666의 본질을 지닌 것입니다. 그것이 국가이든, 철학이든, 지도자이든, 혹은 심지어 교회 안에 침투한 거짓 가르침이든, 우리는 666의 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인내와 믿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든 말씀은 단순한 종말의 공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을 요구하며, 신실한 믿음과 인내를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세속 권세는 짐승의 형상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나며, 거짓 선지자는 종교적 언어로 포장된 이념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제한적이며, 모든 짐승은 심판받을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간 동안만 활동할 수 있을 뿐이며, 그 마지막은 정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짐승의 표 앞에 굴복하지 않고,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로서 담대히 살아가야 합니다(계 13:8).
성도는 짐승을 두려워할 존재가 아니라, 그 정체를 밝히고 진리의 빛을 비추는 자입니다. 우리는 말과 삶으로, 신앙과 행동으로 이 시대의 거짓과 싸워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우리 모두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